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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3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10회 재위 마지막 해 세조는 세자와 함께 온양으로 행차했는데 유자광은 총통장(總筒將)으로 수행했다. 거기서 행차를 기념해 별시를 치렀는데, 문과 초시의 대책(對策) 중에 유자광의 답안이 낙방하자 세조는 시험을 주관한 신숙주에게 물었다. “유자광의 답안이 좋은 것 같은데 어째서 합격시키지 않았는가?” 신숙주는 “고어(古語)만 사용한 데다 문법도 소홀해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조는 “고어를 썼더라도 묻는 본의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괜찮다”면서 유자광을 1등으로 삼고 즉시 병조참지(兵曹參知, 정3품)에 제수했다. “조정이 놀라워했다”는 기록대로 파격적인 지시였다(세조 14년 2월 15일). 그러니까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세조에게 발탁된 지 8개월 만에 갑사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2024. 1. 12.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9회 흥미롭게도 두 서술은 완전히 상반된다. 유자광이 그만큼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은 충분히 보여준다. 유자광의 첫 직업은 갑사였다. ‘으뜸가는 군사’라는 그 의미대로 갑사는 국왕 호위와 수도 경비를 맡는 정예병이었다. 그런 임무상 그들은 당연히 뛰어난 무예를 갖춰야 했으며, 의장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용모와 체격도 뛰어나야 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지배층의 자제로 정규 무관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교대로 지방에 내려가 복무하기도 했다. 유자광이 출세하게 된 첫 계기는 세조 13년(1467) 5월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 난 이다. 그때 그는 28세의 갑사로 그동안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남원으로 내려가 복무하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시애 난은 세조 치세의 맨.. 2024. 1. 11.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8회 1823년(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癸未節目)이 마련되어 좌윤·우윤, 호조·형조의 참의, 병사·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이 운동은 계속 추진하여 집단적인 상소는 1848년(헌종 14년)과 1851년(철종 2년)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즉, .. 2024.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