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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8회 1823년(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癸未節目)이 마련되어 좌윤·우윤, 호조·형조의 참의, 병사·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이 운동은 계속 추진하여 집단적인 상소는 1848년(헌종 14년)과 1851년(철종 2년)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즉, .. 2024. 1. 10.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7회 서얼허통 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다. 정조는 영조 때 조정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1777년(정조 1) 3월에 이른바 정유절목(丁酉節目)을 통해 서얼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혔다. 즉, 문반의 분관(分館)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이전과 같이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부천(部薦)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형조·공조의 참상, 음직으로는 판관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에서는 문무 당하관으로 부사, 당상관으로 목사를 허용하고, 음직으로 생원·진사 출신자는 군수를 허용해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로 승진시키며, 생원·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을 허용해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예문관에 한정해 직강 이하 직은 제한 없이 처리하며, 무신.. 2024. 1. 9.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6회 그러나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는 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許通論者)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조선 명종 초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얼 허통(許通)이 되어 양인 첩의 경우에는 손자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유학(幼學: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을 이르던 말)이라 부를 수 없도록 하였고 합격문서에 서얼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李珥)는 난을 .. 2024. 1. 8.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5회 1415년(태종 15년)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등이 태종의 특정한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살펴 종친(宗親) 및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顯官)의 직사를 맡기지 말자고 건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반집은 정실 부인이 낳은 적자가 없으면 서얼자식에게 제사를 맞기지 않고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형제에게 자손이 없으면 일가에서 양자를 데려 왔던 것이다. 양자를 구하지 못하면 외가 측 자손에게 제사를 상속시켰다. 족보에도 서얼자손은 따로 표시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대감이라고 불렀다. 조선은 성리학의 종주국 중국에도 없는 서얼 차별제도를 실시한 나라였다. 서얼 출신인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 稗官雜記』에서 서얼에게 아예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경국대전』 편찬 후라고 지적하였다... 2024.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