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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3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3회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 먼저 조선의 「서얼 庶孼」제도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산책을 해보고자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전통시대 많은 국가들 중 조선만큼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도 드물었고 우리 역사만 봐도 조선시대 만큼 유난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배층(양반.중인)과 피지배층(상인.노비)이 너무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유교의 중주국인 중국보다 그 정도는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홍길동 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길동은 천한 태생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바로 홍길동은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합친말로 모두 첩의 자식을 일컬었다. 만약 첩이 상민 출신이면 그 자식은 ‘서자’라고 하였고 첩이 노비 출신이면 그 자식은 ‘얼자’.. 2024. 1. 3.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2회 예를 들어 단종 복위사건으로 거사를 도모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 역신들은 능지처참 되었고, 그 가족들은 한명회, 신숙주 등 64명의 공신들에게 노비로 분배되었다. 성삼문의 한 살된 조카는 정창손에게,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와 딸 내은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돌아갔다. 이개의 아내 가지는 강맹경에게, 김문기의 딸 종산은 대사헌 최항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와 딸 백대는 한명회에게 배정되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이 역모죄로 능지처참되면서 순천부의 관노가 되었다. 노비는 양반이 편안하게 놀면서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대신 경제활동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양반 사대부들은 기를 쓰고 노비를 늘리려 애썼다.. 2024. 1. 2.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1회 노비(奴婢)를 말이나 소처럼 사유재산으로 취급한 조선의 양반들~ 의 글(발췌.편집)을 머릿말로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불과 100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부모 중 한 사람만 노비라면 대대손손 노비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고대에는 천역(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 당대에 국한되었고 당사자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元나라에 부역하였거나 무신정권의 마름( 지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소작농 관리하는 작업)으로서 사회 최상위 계급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 중 강윤충은 관노(관청의 소속된 노비)에서 정 1품 까지 올랐으며 고려 충숙왕의 모후, 재상 조석견의 아내 장씨 등과 간통하다 구설수에 오르자 이를 조사하러 온 元나라 환관 고용보를 구워삶아 한통속으로 조정을 농락한 간.. 2024.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