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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스푼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1회

by 짱구킴 2024. 1. 1.

노비문화
노비문화

노비(奴婢)를 말이나 소처럼 사유재산으로 취급한 조선의 양반들~

 

<조선노비열전. (저자:이상각)>의 글(발췌.편집)을 머릿말로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불과 100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부모 중 한 사람만 노비라면 대대손손 노비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고대에는 천역(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 당대에 국한되었고 당사자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元나라에 부역하였거나 무신정권의 마름( 지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소작농 관리하는 작업)으로서 사회 최상위 계급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 중 강윤충은 관노(관청의 소속된 노비)에서 정 1품 까지 올랐으며 고려 충숙왕의 모후, 재상 조석견의 아내 장씨 등과 간통하다 구설수에 오르자 이를 조사하러 온 元나라 환관 고용보를 구워삶아 한통속으로 조정을 농락한 간웅(奸雄: 간고 깨가 많음)이었다.

 

이런 강윤충의 친형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경처) 강씨다 .

 

강씨는 조선건국의 어머니가 되어 신덕황후 강씨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이성계를 설득(?), 1차 왕자의 난의 계기를 만들었던 여인이다.

 

조선 건국 왕실 핏줄에도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뜻이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에 일조를 했던 정도전 역시 고려 사대부들이 제기한 혈통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시달렸다.

조선의 대다수 노비들은 운명에 순응했지만 송익필, 장영실, 장옥정. 정난정. 장녹수 등은 제도의 허점. 인간적인 의지(?). 거센 저항(?)을 통해 팔자를 고친 사람들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위민정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강압적인 공포정치를 바탕으로 500년 내내 양반만의 태평성대를 누렸다.

 

전쟁과 반란이 속출했던 고려시대에는 신분 역전의 기회가 많았던 만큼 노비들의 정계진출도 활발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들어서 귀족들의 무분별한 노비증식과 매매가 성행하자 비인도적인 노비제도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반대로 누차에 걸친 노비제도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인한 부작용은 조선으로 고스란히 전이 되었다.

 

元나라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노비제도를 고수했던 고려 귀족들처럼 조선의 위정자들은 오히려 노비제도를 이용하여 부를 확대하기 까지 했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면서 동족을 노비로 부린 동방 예의지국이었다.

 

조선은 개국초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으로 대외관계를 안정시켰지만 노비들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랜 이민족(원나라)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 건국한 명나라(한족)전통적인 노비제도를 혁파해서 노비신분을 당대로 제한했지만 조선에서는 자손에게 세습하도록 했다.

 

조선의 지배세력은 명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숭상하면서도 오직 노비제도만은 명나라의 제도를 왜면하고 철저하게 조선식을 고수하였다.

 

조선은 비교 불가한 정도로 노비에 의존한 사회였다.

 

그리고 그 노비에 대한 처우는 극악한 정도였다.

 

조선의 선비들이 멸시했던 오랑캐 나라,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족 조차도

이처럼 가혹한 노비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나

노예제도는 존재했었다.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였으므로

이민족인 경우가 많았다.

 

동족을 노예로 삼았던 경우는

경제사범으로 빚을 갚지 못한 경우이거나 죄를 지어서 벌로써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부분은 당대에 노예신분은 끝났다.

 

그러니까 자손에게까지 노예신분이

상속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조선의 노비는 달랐다.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였다.

 

그리고 동족이었고,

 

어제까지 친구로 지내던 사이도

 

하루아침에 노비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노비라고 해서 전부 무식한 것도 아니었고, 태생이 천한 것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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