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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스푼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2회

by 짱구킴 2024. 1. 2.

노비문화

예를 들어 단종 복위사건으로 거사를 도모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 역신들은 능지처참 되었고, 그 가족들은 한명회, 신숙주 등 64명의 공신들에게 노비로 분배되었다.

 

성삼문의 한 살된 조카는 정창손에게,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와 딸 내은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돌아갔다.

 

이개의 아내 가지는 강맹경에게, 김문기의 딸 종산은 대사헌 최항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와 딸 백대는 한명회에게 배정되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이 역모죄로 능지처참되면서 순천부의 관노가 되었다.

 

노비는 양반이 편안하게 놀면서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대신 경제활동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양반 사대부들은 기를 쓰고 노비를 늘리려 애썼다.

 

반면 임금의 입장에서는 노비가 늘어나고 양인이 줄어들면 군역을 담당할 재원이 줄어들게 되므로 일정한 규모 이상의 양인층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비 숫자를 줄이려 애썼다.

 

그래서 노비제도는 여러번 출렁거렸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노비라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로 삼았다.

 

태조는 양반과 비첩 사이에 태어난 서얼을 면천시켜 양인이 되게 했다.

 

태종은 양인과 비(婢)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는 종부법(從父法)을 시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양반이 소유한 노비가 늘 수 없었기에 노비의 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요상한 논리를 앞세워 종모법(從母法)이란 걸 만들었다.

 

즉, 자식의 신분은 애미의 신분을 좇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노비인 여자가 낳은 자식은 아비가 양인이든 양반이든 상관없이 모두 노비가 되는 것이었다.

 

여종을 소유하고 있는 양반의 입장에서는 가급적 여종이 양인과 사이에서 자식을 생산하길 바랐다.

 

그러면 가만히 앉아서 재산을 증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성종임금 때에는 전국의 호구가 100만호에 인구 340만 명으로 집계된 가운데 노비의 수효가 무려 150만 명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비였던 것이다.

 

1609년(광해군 1)에 작성된 울산의 6개 군, 면의 호적에는 2009명 중 48.6%가 노비로 기재되어 있다.

 

심각한 양역(良役: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公役))노역에 종사하는 요역(徭役)과 군사적인 목적의 군역(軍役)이 있었다.)의 부족에 직면한 위정자들은 1543년(중종38)에 양인 남자와 노비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는 종부법을 제정했지만

 

담당 관리나 양반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율곡 이이는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자식을 양인으로 삼는 법을 건의했지만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1574년(선조 7) 경 조선의 국방력 약화 원인을 노비제도로 인식한 조헌은 상소를 통해 노비제도의 철폐 내지 축소를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노비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양인으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불과 20만 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실제로 병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1000여 명 남짓이었다.

 

조선이 양난을 통해 뜨거운 맛을 보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효종대에 절충안으로 자식이 남자일 경우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고 여자일 경우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제도를 잠시 운영했으나 북벌정책이 우야무야되자 백지화되었다.

 

이후 여러 번 제도의 번복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양반 사대부들에게 유리한 종모법이 영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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