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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스푼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6회

by 짱구킴 2024. 1. 8.

조선노비

그러나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는 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許通論者)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조선 명종 초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얼 허통(許通)이 되어 양인 첩의 경우에는 손자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유학(幼學: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을 이르던 말)이라 부를 수 없도록 하였고 합격문서에 서얼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李珥)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서얼로서 6진 일대의 근무를 지원하는 자는 3년만에 허통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직접 채택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예를 낳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심해 광해군 때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하여 박응서(朴應犀) 등 서얼 출신 7인이 관련된 역모 혐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허균이 이들의 두목이라고들 말했다.

 

서얼허통에 관한 조정의 논의는 인조·현종·숙종 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통의 실적은 1597년(선조 30)부터 1735년(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서얼들의 집단상소가 자주 있었다.

 

1695년(숙종 21) 영남 지방 서얼 988명, 1724년(영조 즉위년) 정진교(鄭震僑) 등 5,000인이 각각 상소한 것이 유명하다.

영조는 1772년 서얼을 청요직( 3대 권력기관:홍문관.사헌부.사건원)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얼들의 서열을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서치법(序齒法)을 적용하고, 서얼도 일반 양반과 마찬가지로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문제 등에 부심하였다.

 

영조가 출신 문제를 다룬 얘기만 나와도 노이로제, 편집증적 광증을 보였다는 점은 유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영조의 출신 및 그에 대한 컴플렉스는 거꾸로 서얼 차별을 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전에도 후궁 소생의 왕자 군이 왕이 된 일(광해군, 경종. 다만 선조와 인조도 본인들은 적출이었으나 부친이 서얼이라 '서손'이었다.)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영조처럼 대놓고 천한 무수리였던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왕은 더더욱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짐은 고황제 후궁 소생이었다" (유명한 '강목 사건'에서 나오는, 한문제가 남월왕 조타한테 보낸 편지에 실린 구절) "질차이모비야"(네 어미는 종년이다!라고 꾸짖었다는, 사기 노중련 열전의 구절) 등 출신 신분 얘기가 나오는 구절도 듣기 싫어했고, 왕 앞에서도 함부로 천출이니 서얼이니 하는 말을 하기 어려운데, 다른 서얼에게 하자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청요직 가운데 서얼을 위해 가장령(假掌令)·가지평(假持平) 각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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