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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스푼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3회

by 짱구킴 2024. 1. 3.

노비산책
노비산책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 

먼저 조선의 「서얼 庶孼」제도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산책을 해보고자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전통시대 많은 국가들 중 조선만큼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도 드물었고 우리 역사만 봐도 조선시대 만큼 유난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배층(양반.중인)과 피지배층(상인.노비)이 너무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유교의 중주국인 중국보다 그 정도는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홍길동 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길동은 천한 태생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바로 홍길동은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합친말로 모두 첩의 자식을 일컬었다.

 

만약 첩이 상민 출신이면 그 자식은 ‘서자’라고 하였고 첩이 노비 출신이면 그 자식은 ‘얼자’라고 하였다.

 

양반이 양첩(良妾)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서(庶)이고 비첩(婢妾)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얼(孼)이다, 이를 합쳐서 서얼(庶孼)이라고 한다.

 

“서얼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야 했기 때문에, 원칙상 서자는 양민이었지만 얼자는 노비 대접을 받아야 했다” 서얼들은 기본적으로 힘든 일은 하지 않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는 양반과 별반다름이 없어 보인다.

 

만약 이들이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양반이 될 운명이지만 조선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수 없는 차별을 받았다.

 

순조실록(1823년 8월 2일)에 서얼들의 3가지 소원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게 해 주세요.

 

둘째)집안에 대를 잇는 자식이 되게 해 주세요.

 

셋째)우리도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서얼들이 겪었던 구체적인 차별내용은 17세기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도 나와 있는데 이러했다.

첫째) 서얼은 적자(본처 자식)를 매사 지극히 공경스럽게 섬겨야 한다.

 

둘째)서얼은 적자에 감히 맞서거나 나란히 앉아서도 안된다.

 

셋째)만약 적자와 서얼이 한자리에 앉게 된다면 적자가 앉은 자리에서 약간 뒷줄에 서자가 앉고 좀 더 뒷줄에 얼자가 앉는다.

 

넷째)서얼은 말을 타고 가다가 적자를 만나면 말에서 반드시 내려야만 한다.

 

다섯째)서얼은 작자가 나이가 어려도 절대로 ‘너’라고 하지 못한다.

 

여섯째)서얼은 큰 부자가 되어도 감히 적자를 멸시하자 못한다.

 

일곱째)만약 서얼이 적자에게 무례하게 굴면 관아에서는 벌로써 다스린다.

 

고려시대의 서얼은?

 

그렇다면 언제부터 서얼의 차별이 이렇게 심해졌을까?

 

고려시대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교문화가 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의민.김준 등 노비 출신이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도 했잖은가~ 물론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평민들 사이엔 유교가 별로 였지만 상류층에서는 나름 유교문화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서얼출신은 승진의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13세기 후기

 

손변이라는 자는 부인이 왕족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다.

 

이에 손변의 부인이 안타까워 하며 말했다.

 

“여보!! 제 미천한 신분 때문에 당신이 높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니....차라리 저를 버리고 다른 권문세가의 여인과 재혼을 하셨으면 합니다.” 이 말은 듣던 손변 왈

 

“내가 어찌 벼슬길을 위해 30년 조강지처를 버리겠소. 더구나 우리에겐 자식까지 있지 않소”하며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서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순조실록에 기록된 서얼의 소원 3가지 중 첫째와 셋째 모두 오케이였다.

 

다만 둘째 즉 집안의 대를 잇는 문제는 좀 엄격했다.

 

조선시대엔 본처가 자식이 없고 첩의 자식만 있을 경우 부모가 인정하면 가계를 상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엔 한번 서얼은 영원한 서얼이기 때문에 가계 상속권은 없고 양자를 들이도록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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