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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스푼

<조선(朝鮮)의 노비(奴婢) 산책> 8회

by 짱구킴 2024. 1. 10.

조선노비

1823년(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癸未節目)이 마련되어 좌윤·우윤, 호조·형조의 참의, 병사·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이 운동은 계속 추진하여 집단적인 상소는 1848년(헌종 14년)과 1851년(철종 2년)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즉, 1851년에 任官등용에의 제반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이를 신해통공 또는 신해허통이라하고 이는 서얼 차별을 해결한 조치이다.

서얼의 청요직 진출을 허용하였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조선의 3가지 큰 우환으로 문관이 무관을 멸시하는 것, 속인이 승려를 천대하는 것과 함께 사대부가 서얼을 짓밟는 것을 들었다. 서얼 차별을 우환으로 본 것은 계속된 차별로 인해 서얼들이 원한이 쌓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에서 적·첩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녀(寡女)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공·사 노비 제도를 혁파함으로써 서얼 차별대우의 깊은 뿌리가 잘려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물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첩 제도 자체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뒤에야 공식 폐지되었기 때문에 서얼에 대한 차별의식이 사라지려면 그만큼 더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는 유력 정치인들과 재벌 기업인들, 공무원들은 계속 암암리에 축첩을 했다. 축첩이 실질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16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로, 당시 최고회의는 축첩을 엄금하여 축첩을 한 정치인 및 공무원에게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때렸었다.

 

이쯤해서 앞서

얼자에서 일등공신에 오른 논쟁적 인물

유자광(柳子光, 세종 21〔1439〕∼중종 7〔1512〕)을 살펴 보기로 한다 그는 한국사에서 매우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 명성은 물론 ‘오명’이다.

 

유자광에 관련된 이미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서자의 삶의 방법은 대부분 두 가지다.

하나는 홍길동처럼 저항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일반적인 양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체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그 장애를 뛰어넘는 순종의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유자광도 이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자광은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그는 서자출신도 아닌 얼자 출신이었고 출세가능성은 제로였던 인물이다.

 

뒤에서 보듯이 유자광은 이런저런 관직에 임명되거나 승진할 때마다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며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실제 관직에는 거의 임명되지 못한 특이한 경력을 남겼다.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역임한 유규(柳規, ?~1473)의 서자로 세종 21년(1439)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우후(于後)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인물평을 보자

「유자광은 부윤 유규의 서자인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나빠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까지 길에서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 강간하곤 했다.

유규는 유자광이 미천한 소생으로 이처럼 광패(狂悖)하므로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 남곤, <유자광전>, 허봉, [해동야언]

 

「유자광은 감사 유규의 첩이 낳은 아들이다.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다.

깎아세운 듯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시를 짓게 하자

즉시 “뿌리는 땅속에 기반을 두고 형세는 삼한을 누르네”라는 시를 지었다.

 

유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훗날 그가 크게 성취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자광에게 매일 [한서]의 열전 하나씩을 외우게 하고 은어(銀魚) 1백 마리를 낚게 했는데, 암송에 막힘이 없었고 고기도 그 숫자를 늘 채웠다.」 <유몽인,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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